[인터뷰] 정래정 종손 ‘불사이군(不事二君) 충절의 표상 포은 정몽주 선생’(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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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정래정 종손 ‘불사이군(不事二君) 충절의 표상 포은 정몽주 선생’(상)
  • 조윤형 기자 sisa2018@daum.net
  • 승인 2019.07.24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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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뉴스저널] 조윤형 기자 = 매년 음력 10월이 되면 우리나라 각 姓氏門中들은 바쁜 행보를 보인다. 始祖를 비롯한 조상님들께 祭를 올리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때 참석하는 宗人들의 數를 보면 그 門中 선조들의 위업을 가늠할 수가 있다.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모현면(慕賢面) 능원리(陵院里)는 이 땅에 새로운 통치이념으로 성리학을 도입해 동방이학의 조종(祖宗)으로 추앙받는 포은 정몽주 선생 墓 (忠烈書院)가 있는 곳이다. 그래서였을까? 지난 10월 능원리 마을 사람들의 발걸음이 무척 바빠지고 있었다. 그 이유는 능원리라는 지명은 1576년 선조의 命에 의해 포은 선생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고자 충렬서원이 건립되어 ‘賢人을 추모하는 능이 있는 마을' 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능원리는 영일정씨 포은 공파 8세 직계손인 별좌공(別坐公) 응선(膺善) 종중 후손들의 집성촌이 됐다. 문수산이 좌우로 둘러싸여 마치 어머니 품안처럼 포근하게 감싸주며 사계절 때때로 옷을 갈아입어 木香과 木音이 은은하게 들려와 地水火風이 조화를 이루는 풍광이 아름다운 언덕에 자리잡은 宗宅에서 바쁜 행보를 보이고 있는 포은 선생 가문 24대 종손 정래정(鄭來 晶63) 정암통상(주) 대표이사를 만나봤다.

안녕하십니까? 종택이 웅장하고 품격이 있습니다.

어세오세요. 종인들의 오랜 숙원사업이었던 영당 이축 및 종택 준공식을 2017년 11월에 가졌습니다.  아름다운 山이 병풍처럼 둘러싸여 산수가 수려하고 남향으로 확 트여있어 조망권이 아주 좋습니다. 이제 몇가지 숙원사업 중 하나는 해결된 것 같습니다.

그러면 나머지는 어떤 것들이 있나요?

오늘날과 같이 이 좋은시대를 못보시고 異國땅에서 학자로 항일독립운동가로 소수민족으로 갖은 서러움을 받으시면서 파란만장한 인생을 사시다가 早別하신 아버님 위업을 바로세우는것, 등입니다.

아버님은 어떤 분이셨나요?

저희 아버님의 함자는 철자(哲) 수자(洙)로 (1923-1989)보성전문 현재의 고려대학교 재학 중 학도병으로 징집되어 항일전선에 참가한 대한민국독립유공자로 공훈표장을 받으신 분입니다.

그러셨군요? 독립운동가로 많이 알려진 분들은 안중근, 윤봉길 의사 등을 들 수 있는데 정철수 선생은 조금은 생소한 것 같습니다. 이 기회에 자세히 말씀해 주시지요?

저는 1957년 중국 길림성(吉林省) 연변(延邊)에서 아버지 정철수, 어머니 김순옥(金順玉)여사의 1남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일본학도병에 징집되었다가 극적으로 탈출하여 조선의용군에 가담해 독립운동을 하셨던 아버지가 해방후 중국의 국공내전때문에 귀국할 기회를 잃어 연변에 머무셨습니다. 그 후 교육청에 근무하시던 아버지는 소학교 교사인 어머니와 결혼하셨고 조선인들을 위한 교육에 뛰어들어 중국길림(吉林)시에서 조선중학교를 직접설립하시고 초대교장으로 취임하는 등 교육사업에 열중하셨습니다. 그래서 저희들은 모두 중국에서 출생하였습니다. 그후 지난 1983년 대공산권(對共産圈) 동포에 대한 방송의 일환으로 중국 동북지역에 사는 동포들을 대상으로한 “북간도 동포에게” 라는 제목의 KBS 사회교육 라디오 방송에서 고령이시였던 할머니께서 애타게 아버님을 찾고 계신다는 소식을 듣게되어 아버님께서 귀국하셔서 할머니를 뵙고 중국에 있는 가산을 정리하여 이미 출가한 두 누나는 중국에 머물고 저는 부모님과 함께 1986년에 고국으 로 돌아왔습니다.

 

항일독립운동유공자 정철수선생의 투철한숭조정신!

아버님께서 학도병 탈출 1호이자 독립유공자로 공훈표창을 받으셨다고하셨는데 어떤 분이셨습니까?

아버님은 포은 선생의 직계 23代宗孫으로 한마디로 숭조사상과 민족애국정신이 투철하신 분이었습니다. 아버님은 1943년 12월 보성전문학교(현 고려대) 3학년 재학 중에 학도병으로 강제 징집 당하셨다고 합니다. 할아버님(義烈)께서 서울역까지 나오셔서 학도병으로 나가는 아버님의 모습을 보며 결국 눈물을 보이셨다고 하셨는데, 아버님께서는 이때 나는 포은정몽주 할아버지의 직계 23代 宗孫으로 가문을 이어가야한다. 그러므로 죽는 한(限)이 있어도 일본을 위해 싸울 수 없다는 애국심과 후손을 이어야한다는 종손의 소임으로 그때부터 탈출을 꿈꾸셨다고 합니다. 당시 일본은 태평양전쟁을 일으켜 아시아 곳곳에서 전쟁중이었는데, 학도병으로 끌려간 사람들 중 상당수는 중국 전선에 배치되었답니다. 아버님은 중국으로 끌려가 산동성(山東省) 제남(濟南)의 훈련소에서 훈련을 받으며 항상 탈출할 기회만 엿보셨다고 합니다. 그러다 1944년 3월 25일 뜻이 통하는 동료 두 명과 목숨을 걸고 일본군 병영을 탈출하여 천신만고 끝에 찾은 곳은 항일투쟁 근거지인 태항산(太行山)이었는데 하필이면 이곳은 일본군대와 조선의용군, 중국팔로군(八路軍)의 치열한 항일전투장이었다고 합니다. 이곳에서 일본군과 대치하고 있었던 팔로군 장교 고용(高勇)에 의해 극적으로 구출된 뒤, 그곳에 있는 조선의용군 대오에 참가하게 되었다고 하셨습니다. 남은 가족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하기 위해 성명을 고철(高哲)로 바꾸고 조선의용군 조선독립연맹에 가담해 항일민족독립운동을 하신거지요.

일생을 민족애족, 숭조정신으로 지내온 아버지의 파란만장한 여정을 조명하기 위해 현장을 직접 돌아본 정래 정종손!

그곳을 직접 다녀오신 건가요?

지난 8월 중국 연태에 갔다가 태항산지역 거래처의 동생과 함께 제가 직접 차를몰아 조선의용군 시절 아버지가 계셨던 태항산을 찾아갔습니다. 태항산이 있는 태항산맥(太行山脈)은 산서성(山西省)과 하북성(河北省)의 경계를 이루는 남북 길이 약 600km, 동서 길이 250km에 걸쳐있는 험준한 산맥으로 중국의 그랜드 캐년(Grand Canyon)으로 불리는 곳입니다. 산동성은 이곳 태항산맥의 동쪽, 산서성은 태항산맥의 서쪽이라는 뜻으로 지어진 이름이며 ‘우공이산(愚公移山)’ 이라는 고사가 태항산을 두고 생겨난 말입니다.

제남 인근에서 조선의용군이 자리 잡은 태항산의 감단시(邯鄲市) 하남점진(河南 店鎭)까지는직선거리로 345km에 달하는데, 오늘날 우리나라에 비유하면 서울에서 경상남도 밀양만큼 떨어진 거리입니다. 이 머나먼 길을 아버지와 함께 일본군영을 탈출한 동지 두분이 팔로군 안내원을 따라 줄곧 군장차림으로 도보로 가셨다고 합니다. 현재는 그때에 비해서는 말도 안 되게 길이 좋아졌지만, 그래도 차를 타고 가는 것도 무척 힘들던데 아버지는 그 길을 보름(15일)을 걸어서 가셨다고 합니다.

태항산의 초입에는 넓은 분지가 자리잡고 있습니다. 분지중간에는 비교적 폭이 넓은 청장하(淸?河)가 흐르고 강 건너편은 섭현(涉縣), 동쪽은 하남점진(河南店鎭), 나지막한 언덕에는 남장(南莊)이란 마을이 있는데, 하남점진이 바로 조선의용군이 주둔한 조선독립동맹(朝鮮獨立同盟) 태항분맹입니다. 제가 가보니 중국정부차원에서 보존을 잘해서 그때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더군요. 아버지가 쓰신 극본으로 연극공연을 했던 무대도 그대로 보존되어 있고, 기념관도 잘꾸며져 있는 게 무척 인상적이었습니다.

당시 조선 의용군이 담벼락에 써 놓은 구호도 수십 년 동안 계속 덧칠을 해서 그대로 남아있었습니다. 아버님은 생전 저에게 “조선독립의용군에 가입한것만으로도 일제의 노예로부터 해방된 듯 했고, 주인이 된 듯 한 감격에 휩싸였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때 팔로군과 조선의용군이 함께 주둔하 고 있던 연안(延安)의 어느 동굴에서 강제징집된 일본군에서 목숨 걸고 탈출하였다는 자랑스러운 대한의 건아들을 환영하기 위해 그들이 태극기를 게양하고 애국가를 연주해 주어 참으로 감격스러웠다고 하셨습니다.

해방된 후 주덕(朱德) 총사령관의 제6호 명령으로 조선의용군은 태항산을 떠나 동북으로 가야했습니다. 그래서 동북으로 가기전 전체인원이 모여서 사진을 찍었는데, 무척이나 낡아서 다른 사람은 알아볼 수 없겠지만 저는 단체사진 속에서 아버지를 쉽게 찾을 수 있더군요. 조선의용군은 지난 1941년 12월 12일. 조선의용대 화북지대와 일본군 사이에 치열한 전투가 벌어져 4 명의 동지가 희생된 호가장(胡家莊)을 찾습니다.

전사자는 손일봉(孫一峯), 박철동(朴喆東, 가명 張淸吉), 이정순(李正淳, 가명 王現淳), 최철호(崔鐵鎬,가명韓淸道)이고, 이 전투에 참전한 소설가 김학철 선생은 다리에 부상을 입고 일본군에게 잡혀 포로가 되었습니다. 당시 호가장 마을 주민들은 조선의용대원들의 시신을 수습하여 일본군이 알아차리지 못할 곳으로 100리나 떨어진 황북평촌(黃北坪村)에 묘소를 마련해 주었는데, 저도 이곳을 방문했습니다.

아버지는 1945년 8월 하순. 그리고 1985년 가을에 또 이곳을 방문하셨습니다. 어렸을 때 아버지가 호가장 전투에 대해 들려주시며 황북 평촌의 묘소는 중국식이 아니라 우리식으로 되어있다고 하셨는 데, 가서 보니 지금은 형태가 조금 바뀌었지만 한국의 유족들이 세운 비석이 서있는 게 인상적이더군요.

해방후에 정철수 선생님은 어떤 일을 하셨나요?

아버지께서는 1945년 8.15 해방이 되었지만 타의에 의해 귀국하지 못하시고 중국에 머물러야 하셨기 때문에 군 생활을 접고 그 곳에서 조선인들을 위한 교육사업에 매진하셨습니다.

중국길림 (吉林)시에서 조선중학교를 직접 설립하고 초대교장으로 취임하는 등 교육사업에 정열을 쏟으며 보내셨습니다. 저희 어머니와는 그때 만나 결혼하셨구요. 글쓰기에도 소질이 있으셔서 의용군 시절에는 희곡 ‘조선은 살았다’ , ‘개똥이와 예쁜이’, ‘풍자극 이발 소’ 등을 발표하셨고, 신문사에도 근무하시다가 1958년 4월에는 중국작가협회연변분회 편집부장으로 재직하여 ‘아리랑’, 단막극 ‘일일상사’ 등을 발표하셨습니다.

그리고 김무정 장군등과 함께 조선의용군을 창설, 활동하셨는 데 당시 동료들 일부는 북한으로 가시고 6.25에 참전한 분들도 많으셨다고 합니다. 그래서 저는 아버님께 왜? 동료들과 함께 하지 않으셨느냐고 여쭈었습니다. 그 질문에 아버님은 “내고향은 남쪽이다. 이랬던 저랬던 동족간의 전쟁인데, 여기에 참가하는 게 포은 가문의 종손으로 말이 되느냐?” 며역정을 내셨습니다. 연변에서 사시며 자주 어울리시던 분들도 대부분 독립운동을 하셨던 작가 분들이셨는데, ‘마지막 분대장’ 이란 글로 유명하신 소설가 김학철 선생과 소설가 김용식 선생, 항일운동을 함께 하신 최명세 선생 등과 교류하며 민족의식과 교육에 대해 종종 토론하시곤 하셨습니다.

독립운동과 지식인으로 열심히 사신 것을 보니 한마디로 의지가 강한분이셨군요?

맞습니다. 목숨을 걸고 학도병을 탈출해서 일본군과의 전투에 직접 참여하시고, 민족교육을 위해 애쓰신 것을 보면 참으로 의지가 강한 분이셨죠. 하지만 타국에 있어 부모님과 생이별하고 종손으로서 종사일과 조상님 봉제사에 참여하지 못하는 것을 중국에 계신 내내 한스러워 하셨습니다.

독립운동 때문에 해방전에는 귀국할 수가 없었고, 해방후에도 타의에 의해 중국에 머물다 보니 도저히 귀국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지요. 종손으로 태어나 학도병으로 끌려가기 전까지 조상님을 모시는 봉제사는 할아버님과 아버님이 주도적으로 참여하셨는 데, 타국에 있어 종가집을 지키지 못하고 기제사 역시 참가할 수가 없으니 아버님은 세월을 탓하며 그저 안타까워 하실 수밖에 없었습니다.

평소술을 즐기던 아버님은 술이 한잔 들어가면 나지막히 “나의살던 고향은~” 으로 시작되는 고향의 봄을 부르며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달래곤 하셨습니다. 그리고 저희 남매에게 봄이면 진달래 꽃이 만발한 고향 산천에 대해 설명해 주시곤 하셨습니다. 저희가 중국에 있을 때 아버님이 가장 소중하게 다룬 것은 중국에서 받은 훈장이나 감사장, 임명장같은것이 아니라 저희 영일정씨 족보(族譜)였습니다. 아버님은 틈만 나면 족보를 보시고 저를 불러 앞에 앉히고 족보에 실린 조상님에 대해 설명해 주시곤 하셨습니다.

특히 포은 선조님에 대해서는 많은 이야기를 들려 주셨습니다. 86년도에 귀국해서 저를 데리고 충렬서원(忠烈書院)에서 제를 올릴 때 그 동안 할 수 없었던 宗孫의 도리를 다하는것 같아 아버님은 감격의 눈물을 흘리셨습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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